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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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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대 별점 5개
집에는 빨간 케이스에 담긴 CD가 하나 있었다. 2000년에 발매된 서태지 6집 앨범 < 울트라맨이야 >. 나는 ‘서태지 세대’가 아니지만 당시 가족의 영향으로 ‘시대유감’을 좋아하고 때때로 노래방에서 ‘라이브 와이어(Live Wire)’를 부르는 고등학생이었다. 이렇게 ‘마니아’ 축에도 못 끼는 내가 이 뮤지컬을 기대한 건, ‘서태지 음악’이 아닌 ‘알베르 카뮈’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뮤지컬을 보고 난 후 카뮈는 잊혀지고, 내 안의 울트라맨이 깨어났다. 뮤지컬은 서태지 5집 앨범에 수록된 ‘테이크 원(Take One)’으로 시작한다. 이 노래 도입부의 가사는 이렇다. “내가 말했잖아 너를 데려간다고.” 서태지 음악을 엮어 만든 이 뮤지컬의 완벽한 환영사다.
 
150분에 가까운 공연 시간 동안 20여 곡의 서태지 음악이 무대에 흐른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각색해 ‘저항’과 ‘연대’, ‘정의’와 ‘희망’ 등을 키워드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이야기의 완성도를 일단 제쳐두고, 주크박스 뮤지컬로 어느 정도 제 몫을 해냈다. 서태지의 노래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예를 들어 ‘페스트’가 도시에 퍼진 후 의사 리유가 부르는 ‘슬픈 아픔’이나 기득권의 상징이자 사람들을 이용해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만 혈안이 된 코타르가 부르는 ‘시대유감’ 등은 각 캐릭터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놀랍도록 적절하다. 시민들이 “도대체 너희가 뭔데. 나에게 대체 어떤 권리에”라고 소리쳐 노래하는 ‘라이브 와이어’는 그 자체로 저항이다. 즐겨 부르던 노래가, 예상치 못한 상황과 인물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된다. 이것을 지켜보는 건 꽤 짜릿하고, 이게 바로 주크박스 뮤지컬의 묘미다.
 
< 페스트 >는 편곡을 맡은 김성수 음악감독의 역량이 또 한번 드러난 작품이다. 그는 최근 막을 내린 < 에드거 앨런 포 >의 음악감독이었는데, 그가 추가로 작곡한 넘버 ‘갈가마귀’가 인상적이었다. < 페스트 >에서는 대부분의 곡들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해 웅장함을 더했다. 주요 등장인물과 앙상블이 함께 부르는 1막의 마지막 곡인 ‘코마(Coma)’가 백미다. 인터미션에 들어가기에 앞서 긴 여운을 남긴다. 반면 ‘시대유감’ 같은 경우에는 코타르와 시민을 연기하는 앙상블이 춤과 랩을 소화하며 원곡의 분위기도 잘 살렸다. 빠른 탬포와 랩으로 구성된 가요가 뮤지컬 넘버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예다.
 
이야기의 디테일은 아쉽다. 원작과 달리 뮤지컬의 배경은 기억 제거 장치와 욕망 해소 장치가 개발돼 국가 시민의 행복을 통제하는 미래 도시 ‘오랑’이다. 오랑에 페스트가 퍼지게 되고 시민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폐쇄된 도시에서 이들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의사 리유와 진실을 덮고 혼자만 살려 하는 시장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그 사이에 왜 리유는 시스템에 저항하는지, 기자 랑베르는 어째서 변화를 꾀하는지 등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하다. ‘고립된 도시에서 재앙에 대응하는 각기 다른 방식’을 보여주기에는 인물들이 너무 평면적이다. 세상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미지의 인물인 타루가 여성 캐릭터로 바뀌고 리유와 로맨스를 이끄는 것도 당황스러운 부분이다. 의미는 달라졌지만, 무능한 시장과 자신의 욕심만 차리는 의원과 기업, 그리고 ‘시민들은 벌레 같은 존재’라는 대사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페스트>는 ‘문화대통령’이라 불린 서태지의 음악이 지닌 힘을 보여준다.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면 더욱 즐겁게 볼 수 있다.
작성:
Hye-wo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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